Ⅲ. 결론
이제껏 나는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논리적 허구성을 짚어 왔다.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에 사료적 근거로 삼았던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 기사의 내용의 허구성과 그들이 말하는 침략의 전초기지로 서의 가야가 당시 그들의 야마토 정권과 비교 했을 때 터무니없이 강했다는 점을
: 중국은 최근 정부 산하 조직인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이라는 연구기관의 주도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 달 초부터 한국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학계를 중심으로 학술대회를 여는 등 고구려사를 지키기
1. 서론
요즘 TV에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같은 고구려 소재의 사극드라마가 일색인 것을 보고 '왜 고구려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역사가 워낙 극적이기도 하지만 중국이 비밀리에 진행해 오던 역사 왜곡의 일환인 ‘동북공정’과도 관련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았다. 잠시
고구려와는 대립하면서 국가적 성장을 하였으며, 산업에서는 기후에 맞는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목축을 겸하였다. 반면 정치체제의 진전은 비교적 느린 편이었고, 한 대 이후 북방의 유목민과 남방의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국가로의 성장을 지속해 나가지만, 결국 가야(伽倻)와 마찬가지로 중앙집권
비문>에서는 신라를 다스리는 제왕이 천하의 중심을 장악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룩한다는 세계관을 품격 높은 문장을 통해 볼 수 있다.
3. 국내외의 정치문서 (서간류)
삼국은 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각기 중국 및 일본과의 교섭도 전개했다. 그렇게 하는 데 한문으로 된 국서가 반드시 필요했다. 국
된다. 반만년 역사가 순식 간에 2~3천년의 역사로 반토막 나는 셈이다. 한민족의 역사적 우월성과 자부심에도 큰 타격이다. 대륙을 경영하던 강인한 민족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서 주변 강대국의 기대 짧은 역사를 이어 온 열등민족으로 전락하게 된다. 학계에서는 한국사를 통째
그 의미를 확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원래 금석문이라는 용어는 서적과 같은 종이 기록물에 대한 대응개념으로서, 종이와 다른 종류의 문자 자료를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금석문을 통해서 고대사회(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시대)의 모습을 서술해 보겠다.
1. 글을 시작하며..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사실은 비단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워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늦은 부흥기를 맞았다. 그전에 이미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 대륙 전역을 호령하지는 않았더라도 동아시아에 높은 위상을 떨쳤다. 신라가 당
고구려, 신라, 가야국 시조에 관한 전승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은 모두 고문헌에 정착되면서 고착된 한계를 지니고는 있지만 가장 오래고 가장 중요한 한국 신화자료로서 다루어져 왔다. 국가신화 또는 민족 신화로도 통칭할 수 있겠으나, 건국주제에 관한 자료의 비중이 압도적이어서 보통 건국신
부의 합성어이다. 임나는 광개토왕비, 삼국사기의 강수전, 진경대사탑비, 한원, 통전(通典)등 한국과 중국의 문헌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가야지역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 이후에나 확인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의 문제가 거론되는 6세기 중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