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토지개혁, 산미증식 등의 정책을 사용하였으나, 농업 문제를 산업의 핵심문제로 파악하고 진흥하기위한 올바른 방안으로 주장되던 소작제의 정착, 소작 농민의 단결과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화 사업의 실시, 자작농의 창정 등을 무시하였다. 일제가 한국 경제발전에 진정으로 큰 바탕이 되었다
[1] 서론 : 일제 식민지배정책사에 대한 개괄
경제적 제국주의의 보편적 식민지 지배원리는 ‘최소의 비용에 의한 최대의 수탈’이다. 이러한 경제적 수탈의 목적으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탐험가, 선교사, 기업가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통하여 ‘개척’과 ‘문명화’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영토
소작화전민머슴살이였다. 1928년 현재 월수입 쌀 반 가마 미만이던 이들 세농(細農)은 도시로 유입했지만, 도시에도 일자리는 없었다. 마지막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그들이 곡괭이 하나에 생존의 일체를 도박한 것은 이유 없는 현상일 수 없었다. 무작정 금광 투기에 달려든 이들에게 일제는 거액의 예
소작인, 화전민, 자유노동자로 전락한 반면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토지회사와 일본인들은 무상 또는 싼값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회사령, 산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실시하여 민족의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었다.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 등 전쟁비를 충당하기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였
소작인, 화전민, 자유노동자로 전락한 반면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토지회사와 일본인들은 무상 또는 싼값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회사령, 산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실시하여 민족의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었다.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 등 전쟁비를 충당하기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였
지주에 대해서는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해주고 소작농과 자소작농 및 자작농 등은 토지로부터 분리시키는 목적
산미증식 계획
- 일본내의 곡물부족 해소를 위한 수탈 정책
- 한국농업의 노동생산성이 향상되었으나 그 과실을 일본으로 이전
- 한국농업을 일본의 공업을 위한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화
소작인은 거주형태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빌려서 거주하는 가옥이 지주의 가옥내이거나 부근일 경우에는 협호라 하고 지주가와 떨어져 경지 부근에 지주가 구축한 독립가옥에 거주하는 경우에는 농막이라고 한다. 양자 모두 조선시대의 협호라는 개념에 포괄되고 있다. 협호는 경지뿐 아니
소작 감소, 순소작화전민 급증, 소작지율 증가(29년 55%→41년 58%). 대지주의 비대화
3) 광공업 분야에서 일제에 의한 조선인 중소자본의 수탈
중일전쟁 이후 원활한 군수품 조달을 위해 ‘국가경제통제’정책을 실시하여 원료 자본 노동력을 통제 관리하고, 조선의 광공업을 통폐합함. 소수의 적극
화전현 소재 정의부 소속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듬해인 1927년, 김일성은 길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진보적인 교사들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그 덕분에 192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