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가 있었다면, 해방 후에는 김춘수와 신동집이 있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신동집을 ‘기억되지 않는 천재 시인’으로 곧잘 얘기한다. 그가 태어나 평생을 산 곳은 바닷물이 출렁거리거나, 문명이 채색된 출세의 땅이 아니었다. 분지 대구에서 둔중하게 살며, 깊은 생각들을 시로 갈고 깎아냈다.
그
서정주, 오장환 등과 「시인부락」의 동인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오장환, 윤곤강, 이육사, 이병각, 서정주, 김상원, 이성범 등과 함께 자오선 동인을 결성하여 동인지 『자오선』을 출간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가 당선되면서 문단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이육사가 남긴 작품은 시 36편, 소설 2편, 수필 9편, 일반 평론 7편, 문학평론 5편, 번역 작품 2편과 기타 잡문 6편 등 총 67편이다. 이육사는 시인으로서 시작을 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이원록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시가 다른 작가들처럼 많지가 않다. 하지만 그의 36편 밖에 안 되는 시는 당대의 어느 시
암시한다. 문학 영역의 평가와 관련해서는 이전 교육과정기와 달리 문학감상능력을 평가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문학에 대한 태도와 습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등학교 문학 과목에서는 문학을 이해하고 감상하여 ‘미적 감수성’을 기르고 ‘문학적 상상력을 고양’하며 삶을
신석초, 서정주, 이육사 등과 동인지 <자오선>, <시인부락>등에서 활동 하면서 작품을 발표하다.
1939년 26세
첫시집 <와사등>을 출간하다.
1940년 27세
서울 본사로 올라온지 2년째 되던 해에 상여금을 받아 어머니께서 생활하시며 진 부채를 모두 갚았다.
1947년 34세
두 번째 시집 <기향지>를 출간하다.
1950
이육사’
3) 유리창 - ‘정지용’
1.한국 현대시 약사
(1)현대시 형성의 배경
현대시는 전통적인 민중의식으로서의 구비문학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인문학으로서의 한 시 속에 담긴 선비정신이 접맥되고 다시 신진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외래의 감수성과 시형이 유입됨으로써 세 가지 기본틀이 입체적
신동집 (申瞳集, 1924.3.5 ~ 2003.8.20)
1. 생애와 활동
8·15 해방 전 대구시단에 이상화, 이육사가 있었다면 해방 이후에는 김춘수와 신동집 이 있었다. 김춘수에게 ‘꽃’이 있었다면, 신동집에게는 ‘빈콜라병’이 있었다. 그러나 세인 들은 김춘수는 기억하며, 신동집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시인들은 신
이육사 : 1904-1944
민족시인.저항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생가터 참고>
지금은 그가 태어난 곳에 청포도시비가 우리를 맞고 있다. 1904년 음력 4월 4일은 그의 생일이다.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
이육사, 서정주, 민태규, 김광균 등과는 내왕이 빈번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학동, 『오장환 평전』,45~47쪽)
그해 8월 첫 시집 『성벽』이 자비로, 풍림사에서 간행되었다.
오장환은 다음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명치 대학 전문부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물려받은 유산을 기반으로 서울 종로구에 남만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