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자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활자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42년 장영실로 하여금 우량을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
노선추구 시기(1960~80년대) → 대외경제관계의 확장 추구기(1990년대 이후) 이다. 또한 북한이 공식적으로 추진한 경제계획에 따라서 경제단계별 시기구분을 하면, ① 사회주의의 계획적 발전(1945~56) → ② 제 1차 5개년 계획(1957~61.9) → ③ 7개년 계획(1961~70) → ④ 6개년 계획(1971~77) → ⑤ 2차 7개년
중국 소련 분쟁과 자주노선
■ 빨치산을 주축으로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어떠한 정치적 목표를 갖게 되었는가? 조국의 북반부에 민주기지를 구축, 남한을 사회주의 정치체제로 통합
■ 김일성은 과연 북한에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만들었는가? 남북한을 통합 할만한 정치구조를
노선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김일성은 경제발전을 가장 강조하면서 북한식 스타하노프 계획인 천리마 운동의 성공을 위해 ‘청산리 방법’과 ‘대안의 사업체계’ 이 방식은 그 동안 채택되어 온 정책결정의 단일 관리체제를 지방당 위원회의 주도 하에 공장이나 협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가 입증되었다는 자신감. 김일성은 당의 지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며 수정주의 비판으로 논리 전개. 이 당시는 ‘반혁명폭동음모’ 발언은 없었음.
- 58년 3월 8일 인민군 내 당정치사업 토의를 위해 소집한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군 내 ‘반혁명폭동음모’
노선의 강화, 자주 국방 노선의 추구는 북한의 자원부족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고 이것은 기술 혁명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북한의 기술혁명은 두가지 원칙에 따라 추진되었다. 먼저 과학기술발전을 자력 갱생의 혁명정신과 결부시켜 진행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전인민적 운동으로 기술 혁신
노선으로서 <혁명적 민주기지>노선을 제시하였다. <혁명적 민주기지>노선은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창립대회에서 채택되었고, 1948년 8월 29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 합동의 북조선로농당 창립대회에서 보다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①‘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말미암아 전국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숙청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정리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함께 김일성은 경제 부문, 역사 서술, 통일 전선 방침에까지 소련계와 연안계의 잔재를 정리하며 숙청을 무
노선, 63년 ‘정치에서의 자주’ 노선을 천명하였다. 1960년 이후 그동안 전후 복구를 위한 사회주의권의 원조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북한의 선택은 동구의 코메콘 기업이나, 자유화의 방향이 아닌 오히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노선을 경제에 도입했던 것이다. 소위, 빨치산 전통의 도입
노선의 제도화로, 생산자 대중을 기업 관리에 직접 참가시키는 새로운 경제 관리 체계로, 작업반 내부채산제가 중요한 형태 중 하나이다. 결국 대안의 사업 체계는 위로부터의 당적 지도와 밑으로부터의 대중의 자발성을 결합시킴으로써, 중간 관료 조직에 의해 당 정책이 하부에서 행동으로 전환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