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5장~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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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
(5장~종장)
□ 강독한 저작의 주요내용 및 논지 요약
제5장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지도(一元的指導)’ 체제 확립(1958~1961)
1. 만주파의 권력 장악과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1) 제1차 당대표자대회와 숙청의 총괄
1956년 6~7월의 소련, 동유럽 방문 이래 조성된 당 내 위기를 의도한 대로 극복한 뒤에 김일성은 자신감을 가지고 소련과 중국 방문에 임하게 되는데, 당시의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일어난 변화가 김일성이 시행한 방침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김일성은 확신했다. 소련 방문 성과로서 김일성은 소련 측으로부터 국내 소련계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함과 동시에 소련과의 협약 체결을 통해 소련 국적과 북조서 국적을 함께 가진 이중 국적자가 한 쪽의 국적을 선택하게끔 했다. 이후 불기 시작한 숙청의 폭풍우 속에서 소수의 숙청자를 제외하고 상당수의 소련계는 신변상 위험을 피하려 소련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 이것은 김일성의 정책이기도 하며 그들에게는 정치적 망명이 아니라 소련 공민으로서의 귀국이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는 마오쩌둥과의 담판이 의미있었는데, 그 결과 북조선 주둔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에 관한 합의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625 전쟁 중 만들어진 조중연합군 체제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당과 군 내의 연안계 처우를 둘러싸고 중국 측 반응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 이후 인민군 내에서 연안계와 소련계를 추방하여 명실 공히 항일빨치산의 군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착수했다. 아울러 지방당 차원의 ‘반혁명적 무장폭동사건’이나 ‘반종파투쟁’에도 박차를 가했다.
한편, 1958년 3월에 열린 당 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은 1957년도의 경제적 성과로서 중공업우선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숙청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정리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함께 김일성은 경제 부문, 역사 서술, 통일 전선 방침에까지 소련계와 연안계의 잔재를 정리하며 숙청을 무리해나갔다.
2) 당기구 확대와 세력관계의 변화
전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고 당내 숙청도 마무리됨으로써 다음 당면과제는 통치기구의 전면적 개편이었다. 김일성은 3월 당 대표자회 기간 중 각 지방의 도시군당위원장들과 인민위원장들을 별도로 소집하고 김일성은 당기구 확대와 연관된 당사업방식의 문제점, 당간부사업의 변화, 지방당, 특히 군당의 기구 및 사업방식 등에 대한 내용으로 연설했다. 이후 당부서의 개편, 내각의 개편, 경제부분의 분리 등을 시행하여 중국에서와 같은 ‘대구(對口)지도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1959년 8월 28일 당중앙위 상무위원회는 「당 정치사업을 모든 사업에 선행시킬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여 “정치도덕적 기준”이 “실무적 기준”에 우선하는 내용으로 당 우위 원칙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아울러 지방공업이 급속히 성장하고 경제 가 부분의 많은 권한이 지방으로 이관된 것과 관련, 지방정권기관에 대한 당의 ‘지도와 통제’도 한층 더 강조되었다. 1959년 12월의 당중앙위 확대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공장 내 사업방식에 관해서 “공장 안에서 최고지도기관은 지배인이 당위원장이 일”하게 되어 “공장당위원회 결정에 따라 지배인은 행정사업을 하고 공장당위원장은 당 사업을 하여야 한다”고 말해 각 공장에서의 당 우위 원칙을 재강조하는 것은 다른 기관에서의 적용도 언급하였다. 이러한 당우위의 제도화는 김일성도 말한 바와 같이 우선 군대 내에 도입되고 이후 지방경제도체계의 개편과 함께 농촌에서는 ‘청산리방식’으로, 공장에서는 ‘대안의 사업체계’로 2년 정도 걸려 실현되어 간다.
3) 제4차 당대회 : 「승리자의 대회」
1961년 8월에 개최된 제4차 당대회는 『로동신문』에서 「영광스러운 승리자들의 대회」라고 칭할 정도로 자심감을 표현한 대회였다. 김일성은 다섯 부분에서 6사건 이상에 걸쳐 보고를 하는데 대부분 사회주의 개조와 건설 관정에서 얻어진 경제적 성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당 대외는 김일성 보고에 대한 토론도 이루어졌지만 제3차 당대회 때까지와 달리 토론 내용 내용에서 조금이라도 당내 갈등이나 불협화음은 엿볼 수 없었다. 이는 당 규약 전문 내용의 변화에서 알 수 있는데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항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영예로운 혁명전통의 직접적 계승자이다”라고 규정했는데, 여러 민족해방 투쟁의 전통에서 김일성의 빨치산투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투쟁 전통은 배제대고 빨치산 투쟁으로 일원화 된 결과이다.
2. 만주파의 당군 장악과 당군 일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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