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예술총연맹의 국제문화국장직을 맡으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희곡 <뇌성>,<호접> 등의 희곡도 본격적으로 창작하였다. 희곡을 창작한 것은 그가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맹이 높은 상태에서 대중에게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간번화된 소
북한 이기영은 최고인민회의의 부의장과 문학예술총연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북의 문단을 주도하다가 1984년에 사망하였다.
이기영의 <고향>은 1933년 11월 15일부터 1934년 9월 21일까지『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오빠의 비밀 편지>(1924)에서 출발하여 <종이 뜨는 사람들>(1930), <홍수>(1930
북한 이기영은 최고인민회의의 부의장과 문학예술총연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북의 문단을 주도하다가 1984년에 사망하였다.
이기영의 <고향>은 1933년 11월 15일부터 1934년 9월 21일까지『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오빠의 비밀 편지>(1924)에서 출발하여 <종이 뜨는 사람들>(1930), <홍수>(1930
예술원 회원, 1996년부터 중앙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1998년부터 흥사단 명예단우 등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비롯해 희곡과 시나리오 수필 등의 작품 활동도 꾸준히 병행 하다가, 청년기 때부터 앓던 폐결핵으로 2004년 5월 별세하였다.
2. 구상 시의 특징
① 연작시 김은경, 구상의 연작시 연구: 그리스도
북한에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혁명 작가로 추앙 받고 있는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하순경 중국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이 직전에는 일본군의 종군 작가단에 소속되어 있다가 탈주했다.
평양에서는 김일성의 신임 아래 ▲북조선예술총연맹 집행위원 겸 국제 문화 국장 ▲평남도 예술
북한의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의 기관지인 《문학예술》 4월호에 실린 「2월의 노래」에 의해 그의 월북이 확인되었다.
월북 후 1950년 전반기까지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쪽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점과 극도로 악화되었던 병세로 1951년 6월경 신장병으로 사망하였다.
Ⅱ. 오장환
북조선분국 창설이 결정되었고 김일성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 남한에서의 공산당 세력에 관한 다양한 통계와 자료를 살펴보면 남한에서의 당과 외곽단체가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나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직사
북만주에서의 생활을 담은 시 속에는 나라를 잃은 설움과 실의 속에 방황하며 느낀 절망, 비애, 허무들이 용해되어 있다. 문제작으로 일컬어지는 <수(首)>도 이 때 썼다. 북만주 체험을 배경으로 한 시집「생명의 서」(1947)에 실린 작품으로 친일작품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십이월의 북만 눈도 안 오고
북한 사이에 혁명의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상대적으로 남한혁명의 독자성을 고려하여 지역혁명론을 내세웠다. 1964년 당 중앙위원회 4기 8차 전원회의에서는 조국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조선 혁명역량`,`남조선 혁명역량`,`국제 혁명역량`등 3대 혁명역량의 강화를 표명함으로써
中
‘서울문학동맹 벗님들에게’를 보면 이태준은 소련을 방문한 후 다시 남으로 내려올 생각이었으나, 귀국 후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나서 다시 남으로 내려가는 것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북에 계속 체류한 것으로 짐작된다.
3) 조선문학가동맹과 북조선 문예총 사이에서 이태준의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