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와 한반도
당나라가 개국한 618년의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 1년,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40년, 백제 무왕(武王) 19년에 해당되며,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은 신라 ·후백제 ·마진(摩震) ·발해(渤海)가 한반도 및 만주 일부지역에서 각축을 벌이던 때이다. 당나라 건국 3년 후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완수하였다. 943년 훈요십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임금 자리에 오른 지 어언 25년, 이미 나는 마음도 늙었다. 오직 두려워하는 바는 자손들이 정과 욕심을 함부로 하여 기강을 어지럽힐까하는 일이다. 따라서 훈계를 주는 것이니, 이를 후손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1. 서부 평야 지방
1) 전주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고, 조선 때는 호남 제일의 행정중심지였다. 조선 때 전주는 왕실(전주 이씨)의 본관으로 중시되었다. 한지, 화선지등 전통공업이 이어져 내려와 유서 깊은 도시이다. 전주는 군산, 김제, 정주, 남원, 진안 등지로의 교통이 편리하고, 상업 및 교육
후백제를 세우게 되니, 이에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들 중 철원의 궁예는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며 다른 지방호족과 힘을 합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우고, 후삼국 시대의 주도권을 먼저 장악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궁예에 대한 기록은 심히 부정적으로 기
후백제(892~935), 후고구려(901~918), 발 해(698 ~ 926)로 구분한다.
3) 한국의 古代社會
古朝鮮社會의 靑銅器文化 성장과 사회변동을 보면 古朝鮮, 夫餘, 辰國등 각처에서 태양의 자손임을 표방하는 부족국가가 출현하여 新石器문화를 기반으로 하던 사회관계의 변동(자급자족경제 해체)하면서 청동기무기
후백제 견훤의 침략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 신라 천년의 종말을 내리게 된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포석정이 어느 시대에 무슨 목적으로 지어졌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나, 최근 발굴결과와 여러 정황을 볼 때, 포석정은 삼국시대(통일전)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졌으며,
후백제의 해로를 차단한 목적으로 왕건(909년)이 남하하여 나주를 차지할 때, 진도에 먼저 입성하여 기지로 삼았다. 고려 원종 11년(1270)과 12년(1271)에 삼별초의 입성과 여몽연합군에 의한 그들의 패퇴, 그리고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영암으로 군민을 소거시켰던 것, 또 선조 30년(
후백제(900-936)와 후고구려(901-918)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통삼한’의 민족사는 또다시 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즉 후삼국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은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후고려의 기반을 계승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Ⅱ. 나말여초의 변혁을 주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였다. 다음 기이편은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2권에 계속 된다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31항목, 의해 편에는 원광서학근을 비롯한 신라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