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격전장이었던 황산벌이 바로 이곳 논산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현세와 와서 신병을 훈련시키는 훈련소가 세워졌고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은 고되게 논산땅과 부대낀다. 황산벌에서 신라 5만 군사의 손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백제 계백 장군의 묘가 있는가 하면, 그로부터
후백제를 세운 후 고려 태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40여 년간 후백제의 수도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성종 2년에 전 주목 (牧)이 되었고 동 12년에는 승화절도 안무사, 동 14년 12주 절도사로서 순의군(順義軍)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 (현종 9)에 안남 대도호부로, 동 13년 전 주목이 되었다. 공민왕 때에 완산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왕건은 935년 신라의 귀부(歸附)를 받고, 이듬해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국호를 '고려'라 하고 북진 정책을 추진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을 중시, 북방을 개척해 국경선을 청천강까지 확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생천을 거쳐 한주.철원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 지역에 그치고, 전 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 세력의 휘하에 들어
후백제 세력이 건재하고 있었다.또 지방 곳곳에는 신왕조를 위협하는 호족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다.고려 왕권에 대항하는 호족 세력의 위협은 즉각 드러났다. 왕건이 왕이 된지 불과 5일 째 되던날,환선길이 반역을 도모했다. 왕건이 왕이 되는 데 공헌했던 환선길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졌던 것이다
후백제(後百濟, 892년)를, 송악(松岳, 開城)에서는 궁예(弓裔)가 후고구려(後高句麗, 901년)를 건국하여 다시 통일 이전의 양상과 같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후삼국은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高麗)를 새로이 건국한(918년) 왕건(王建)이 935년에는 신라를, 936년에는 후백제를 병합하여 천년에 걸쳐
후백제의 연대도 표시하였는데 삼국사기 연표의 경우와는 달리 역대 왕의 출생·즉위·치세를 비롯하여 기타 주요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간단히 기록하고, 저자의 의견도 간간이 덧붙여 놓았다. <기이>편에는 그 제1에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 및 신화
후백제의 해적들이 진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잘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서 따르게 했다. 삼국유사(상),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p.167~168
진성여왕 시대에는 상당히 도적 떼가 상당히 많아 위험했는데 한번은 왕의 막내아들 양패가 당나라의 사신으로 가게 된다. 이 때 당나라로 가는 바닷길에 후
후백제의 연대도 표시하였는데 《삼국사기》 연표의 경우와는 달리 역대 왕의 출생·즉위·치세를 비롯하여 기타 주요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간단히 기록하고, 저자의 의견도 간간이 덧붙여 놓았다. <기이>편에는 그 제1에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 및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를 왕건이 936년에 통일했고, 이후 약 456년 동안 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했는데 918~936년의 18년은 엄밀히 고려시대가 아닌 후삼국시대다. 그러므로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부터 고려가 멸망한 1392년의 역사이므로 456년이 맞다. 1392년 당시 실권자였던 수문하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