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世采 撰), 孝子水南放翁君墓碑銘幷序(朴世采 撰), 水南放翁遺稿序(朴弼周 序), 祭文(盧亨敍 撰), 및 漢詩, 국문으로 된 시조 20수와 <聖主中興歌>, <嘆窮歌>, <迂歌>, <龍湫游詠歌>, <水南放翁歌> 등 가사 5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목판본 『慶州鄭氏世稿』에는 放翁遺稿序(박필주, 李惟精 序), 제문(노형서
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배척받았다.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박은
Ⅱ 본론
1. 구운몽의 시대적 배경
조선시대는 유교,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이 체제는 확고했는데, 실제로 같은 유학임에도 양명학은 선학(禪學)과 비슷하다하여 이황(李滉), 박세채(朴世采) 등에게 이단으로 배척 이황은 『傳習錄論辨
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배척받았다.
수용 초기의 대표적 학자로는 남언경, 이요, 박세당, 윤휴, 장유, 최명길 등이 있는데, 그 중 최명길은 현실적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청나라와 화친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명분에 사로잡힌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적극적인 현실 인
Ⅰ. 서 론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한 이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전까지의 전기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기로 나눌 수 있는바 그 기준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종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를 조선 후기로 설정하고, 이때를 조선 왕조가 와해되어 무너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