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人)은 무학(無學)의 천민이었다. 내용이나 표현이 사대부의 권위와는 맞지 않는 것이어서 체계적인 발전이 불가능했다. 자연 판소리 관객은 서민 위주였고, 명맥도 구전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사회의 변화로 조선 초기의 악장이나 양반 가사는 기호 층이 한정되어 소멸
說話)는 호남지역 만의 것일 수는 없다. 흥보가의 근원설화는 몽고의 박타는 처녀가 언급될 만큼 세계적인 분포의 모방담(模倣譚)을 그 구성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호남으로 정착하기 이전의 판소리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전국 각 지역의 설화와 그 지방의 음악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형태로 추측
- 송대 소설의 개념 -
육조 및 당대 소설관이 주로 문언소설의 흐름 속에서 제시된 것들이라면, 송대의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백화소설 형식이 등장하면서 '소설'이라는 말에는 새로운 의미가 첨가된다. 즉, 송대 이후로 소설이라는 말은 논자의 관점에 따라 첫째 잡록·필기·전기 등 전
당말 五代의 혼란한 틈을 타 960년 후주의 금군 조광윤이 진교병변을 일으켜 후주 정권을 탈취, 송을 건립하였다. 건국 초기의 태조, 태종은 중앙 집권제를 실시하여 기본적으로 중원과 남방의 통일을 이룩하였지만, 서북 지역에는 거란족이 요를 당항족이 서하를 건립하였다. 그런데 1127년 동북 지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