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배경이 되는 후기 중세는 기존의 권위와 이에 대한 반항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교회는 세속권세를 아울러 지배하려는 교황청의 집요한 시도를 통하여 교황권의 우위가 계속적으로 선포되던 시기였으며, 이에 대하여 산발적인 비판이 있었다. 또한 세속군주들은 이와 반대로 교
교회는 제외), 즉 침례교도, 퀘이커교도, 가톨릭 성향의 영국국교도 모두를 포괄하는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썼다. 유니테리언파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이같이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700년 이전이었다. 예를 들어 1689년의 영국 관용조례는 ' 영국국교회를
종교개혁은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고쳐서 신약교회의 원형으로 개조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 이아니라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 위클이나 후쓰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였고 버나드나타울러나 엑카르트는 신비적
종교개혁자들은 마태복음28:16-20의 선교의 대사명을 사도들에게만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고 선교의 의무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사명임을 역설하였다.
전호진, 「선교학」,(1985, 개혁주의 신행협회, 서울), p. 29.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선교에 공헌할 수 있어야
개혁이전부터 교황의 무오설을 비롯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탈선된 교리에 대하여 누누이 지적해오던 선구자들의 터 위에서 계속된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위크, 후쓰를 위시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교회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