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하여 국력을 배양 ․ 강화하고 외래 침략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적극적인 내외정책의 수립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개화사상은 발생된 것이다.
개화사상의 사상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실학자들의 실사구시에 대한 개념이 개화사상에 풍성한 사상적 소재
개화에 대한 인식, 청국·일본에 대한 관점, 개혁을 둘러싼 방법론 등의 의견차이로 말미암아 변법개화파와 점차 사이가 벌어지는 경향을 보여왔고, 급기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각자 판이한 노선의 행동을 취하였다.
정치적 당파
중요 인물
정치적 특징
급진개화파
(개화당)
김옥균, 홍영식, 박영
사상이나 갑신정변의 개혁안보다 한층 적극화했고 토지문제에 있어서도 개화당보다 실학자의 개혁안을 이어받아 농민적 소유를 주장했다가 결국 균등한 경영, 즉 분작을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개항 전 민란 때부터 농민이 주장해오던 3정의 문란에 대한 시정 요구가 강력히 주장되었다. 갑신정변 세
일본과 맺은 조선 최초의 근대화 조약이자 불평등조약 (해안 측량권, 치외법권 허용).
1882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 修好 通商 條約)
청의 알선으로 미국과 맺은 조약 (치외법권, 최혜국대우 규정).
1882
임오군란(壬午軍亂)
민씨 정권에 대한 도시 하층민의 불만과 별기군에 대한 차별로 인한 구식
개화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갑신정변을 부르주아 민족 운동의 서막 내지 개혁이라고 평가하였다. 정변 방법은 ‘혁명적 인민대중’에 의거한 것이 아닌 국왕을 설득하는 개량적 방법으로, 그것도 일본인과 결탁한 것으로 결국 일본에 이용당하였다고 보고 있다.
리나영의 갑신정변과 개화파에 대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