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사나 의식사적인 면에서 제 나름의 체계를 마련하는 일에도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소설에 비해서 시가의 경우에는 이러한 느낌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김영철, 「개화기 시가의 창작계층 연구」, 『대구어문론총』제8집, 1990.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보여 진다. 하나는 전술한 바와
개화기 문체를 구분하면 1) 한문체 2) 국문체 3) 국한문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과 2)는 이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전자는 양반계층의 전용어로, 후자는 부녀 및 서민들의 전용어로 병행되어 이중 구조를 보여주었으나 3)에 와서, 삼중구조의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오래가지 못하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당시 조선을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청 일의 세력관계 속에서 외국(청)의 무력개입에 의해 패배하면서부터 민씨정권의 대외의존성은 더욱 심해졌다. 정치적으로는 청이 우세한 가운데 경제적 침략을 둘러싼 청 일의 각축전 또한 치열하였다. 특히 일본은 청이 임오
연구와 평가는 한철호의 「개화·일제강점기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2004)의 pp.55~56를 참조하였다.
4. 북한학계에서의 김옥균 연구와 평가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된 이후 북한의 근대사 연구는 모두 사적 유물론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 해방이후 북한학계에서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서술한
개화기 시가 가운데도 초창기에 속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창작을 게재하는 독립된 난이 마련되지 않은 채 실려졌다. 또한 그 꼬리에 “아무것도 몰은 사 감히 일언 옵내다.”라고 부기를 달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