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屬國)의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 종속관계의 원칙을 깨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적극 개입하였다. 따라서 임오군란 이후 1894년 청일전쟁 무렵까지 추진된 개화정책은 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파견
4) 갑신정변
① 배경 : 이 시기에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청국의 힘에 의존하려는 민씨 세력이 이에 반대하는 개화파가 대립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갑신정변 주도파는 국제여론을 빌어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개화파는 일본의 힘을 활용하
민씨 일파의 세력이 커져갔다.
이같은 상황에서 1875년 의도적으로 운요호(雲揚號)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1월 군함을 이끌고 무력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하였다.
모두 12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은 20개월 안에 부산과 그 밖의 두 항구를 개항하며, 일본은 수시로 조선의 해안을 측량할 수 있도
개화의 필요성과 개화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터득했다. 그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1882년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서재필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의 국내외 정세는 조선조 정치제도의 자존과 발전을 제약하는 국내외적요인들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전환기적 변동을
개화정책을 백지화시켰으며, 민씨 척족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2) 외세 개입과 청의 대 조선정책의 변화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과 청은 각각 군대를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6월 15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