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소위 현대적 사고방식에 맞춰서 기독교를 대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19세기는 쉴라이엘마허의 시대이다. 그는 정직한 신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사상과 세속학문 및 대학교수들과의 대화를 강조한 것
주의에 대한 반발로 두 가지 반응이 대두하였는데, 그것은 곧 합리주의와 경건주의이다. 합리주의는 정통주의의 지적 기반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며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18세기가 되기까지 독일에서는 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대신 정통주의에 대한 또 다
자랐으며 학문과 경건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히 1687년 회심 사건을 통하여 프랑케는 사변적인 신앙에서 체험적인 신앙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독일의 할레에서 루터교 목사로 그리고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하면서, 그의 선생이자 동료인 슈페너가 제안했던 경건주의적인 삶을 살았
주의 사이에 대륙의 개신교 내에 있는 가장 중요한 발전은 청교도(Puritanism) 운동과 경건주의(Pietism)라고 알려진 위대한 종교 부흥운동이었다. 이것은 개신교 교회 생활을 깊이 있게 자극시켰고 갱신시켰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은 영국 국교회의 경직화에 대항하여 생겨난 것이며,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자연히 무관심하게 되었다. 넷째, 경건주의자들은 세속으로부터의 성별의식, 세상의 자녀들로부터의 분리의식에 의해 강화된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경건주의는 실제적 삶의 실천 속에서 교리를 확신하기를 열망했던 교회의 내적 개혁운동을 뜻한다. 경건주의의 윤리적 기준은 세속으로부터의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