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대경기체가에 대한 근대적인 연구는 자산 안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29년 『별건곤』12월호에 기고한 「조선가시의 묘맥」이란 글에서 경기체가를 ‘경기체’라 하여 우리 시가의 한 장르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체를 첩성체의 일종이라 보고, 그 체의 한 작품인 「한림별곡」은 고
시가로서의 구실을 맡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이명구, 1963)
이래 후자의 견해로 거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7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작품들이 발견되면서 이에 따라 연구도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이러한 1970년대 이래의 연구에서 드러난 주요한 논란점으로 경기체가의 장르적 성격을 들 수가
그러나 비록 양자간에 형태면의 공통성이 있다손 치더라고 그 수사상의 표현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판이할 뿐만 아니라 후렴구의 구성도 다르며 또 그것이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는 송축가류로 변모하는 등 그 시가적 성격의 차도 개재한다는 점에서 별개의 장르로 다루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별곡의 기원과 생성, 발전, 분화, 변천 등 경기체가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연구는 국문 시가의 다른 분야의 연구가 아직 깊이 있게 이루어지지 못한 시점에서 연구의 방향만을 잡는 밑그림을 그리는 정도뿐이었다.
2.2. 1940~1950년대
1940~1950년대의 경기체가에 대
진면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뒤 해방후에 양주동의 『여요전주』(을유문화사, 1947)에서 문헌 ․ 주석적 연구의 성과를 이루었고, 조윤제는『조선시가의 연구』에서 고려속요의 위상을 제시했으나 고려속요를 평민들의 문학으로만 취급함으로써 향유층의 범위를 축소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