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띤다.
우리는 내물왕과 박제상에 관한 일화를 두 사료를 통해 분석하고 비교해 보면서 어느 것이 더 역사적 타당성
왕비가 짜놓은 가든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 하라 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지내니 일월이 옛날처럼 되었다. 그 비단을 어고에 소장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라 하고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 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왕조
태조 왕건은 고려의 북쪽, 고구려의 옛 땅을 찾으려고 요나라를 치려 하였으나 백성들이 전쟁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만 두고 백성들을 돌보려고 3년 동안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않고 대신 고려의 고유한 풍속과 제도,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는 꼭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권을 안정시
왕공적기념호우 (廣開土大王功績紀念壺杅)다.
그릇이다. 호우명 그릇 사진의 아래에는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적혀 있었다. 호우명 그릇과 관련된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관계에 대한 설명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호우명 그릇을 둘러싸고 있는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