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띤다.
우리는 내물왕과 박제상에 관한 일화를 두 사료를 통해 분석하고 비교해 보면서 어느 것이 더 역사적 타당성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제2
아달라이사금
아달라이사금이 즉위하니, (이는) 일성왕의 장자다. 키가 7척이요, 코가 크고 상이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 지소례왕의 딸이요, 비는 박씨, 내례부인이니 (이는) 지마왕의 딸이다.
원년 3월에 계원으로 이찬을 삼아 군국정사를 맡겼다.
2년 정월에 (
내용이다. 둘째 문단은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로서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六部)출신의 고위관리 7인이 계미(癸未:503년으로 추정)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절거리가 죽은 뒤 그 집 아이 사노(斯奴)가 재산을 상속받을 것과 말추(末鄒) 사신지
본과의 교섭도 전개했다. 그렇게 하는 데 한문으로 된 국서가 반드시 필요했다. 국서는 외교상의 용건을 전할 뿐 아니라, 문화적 역량을 과시하는 구실까지 했다. 비문으로 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글은 나라 안 관민에게 보이기 위해서 쓴 것이므로 구태여 기존의 격식에 구애될 필요가 없었으나, 외교를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처용설화와 처용가의 여러 관점을 살펴봄과 동시에 각 등장인물의 연구와 그밖의 다양한 연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가사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그 밖의 향가 작품들을 소개하여 향가가 다양한 작가계층에서 널리 애용되었음을 알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