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문하생은 처사로 지내기도 하고, 정계에 나가기도 하고, 의병장이 되기도 했다. 최영경, 정인홍, 곽재우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남명정신을 투철하게 계승하였다. 초야에 물러나 있었으나 당대의 현실을 ‘급구(急求)’로 인식하며 벽립천인의 기상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실천의지
남명이 그의 사상 속에서 항상 민생을 잊지 않게 하였다.
단성소(丹城疎) 1555년(명종10)단성현감 조식이 올린 상소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글러먹었고 나라의 기반은 이미 무너졌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멀어졌습니다…말단 관리들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
.
III. 자신의 사직 의향에 대한 세상의 반응
1. 세상을 깔보고 제멋대로 편하려고만 하는 것 아니냐?
2. 사양하는 체 겉으로 꾸며 이름을 구하는 것 아니냐?
3. 임금을 명을 지체하여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
4. 어리석고 낮은 인물이 망령되이 옛 성현의 의리를 핑계하는 것 아니냐?
1. 남명조식
(1) 남명조식의 생애조식은 1501년(연산군7)~1572년(선조)의 사람으로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건중, 호는 남명, 생원안습의 증손으로, 승문원 판교 언형의 아들이다.
26세 이전까지 한양에 거주하였으며 기초학문 학습과 과거를 준비하였고 이후 산해정, 뇌룡정, 산천
◆ 수양론과 궁리론
퇴계 학문의 기본적 성격은 주자를 표준으로 하여 도학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는 성리설의 개념적 분석체계와 더불어 수양론의 실천방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학의 학문적 기본방법을 거경(경의 생활화)과 궁리(진리탐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