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사상은 경상우도라는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사림파의 학문세계를 추구하였는데, 특히 김해의 산해정, 합천의 계부당. 뇌룡정, 산청의 산천재 등지는 그의 사상적 기저를 발현하는 대표적인 교육장소였다. 남명학파의 지역적 범위는 대체로 진주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김해, 밀양, 청도,
남명학을 완성한 시기이다. 남명은 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5,6세 정도까지 자라다 부친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하게 됨으로써 한양으로 이사를 하여 한양에서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보냈으며,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양 삼가에서 삼년상을 치른 뒤, 서울로
이 황은 서 경덕이 수족의 동작 및 보고 듣고 하는 감각작용을 기지묘처(氣之妙處)라고 한 데 대하여 그를 지기묘처로만 설명하고 이에 귀속시키지 않는 것은 편견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의 작용이 아니라 이의 작용이라고 하였다.(퇴계집 권25 답정자중별지)
이 황은 또 왕 양명의 주관적
남명조식과 퇴계 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
1. 서 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남명조식선생은 조선 전기 유학의 거두로 인식되지만, 치열한 당파 싸움과 정적들의 견제속에 정치에 있어서는 자신의 뜻을 널리 펴지 못하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을 도모하는데 일생을 바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당시 사회는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억압이 한창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