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한문, 국한문에서 순국문으로 점진적 발전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다. 개화기 한국의 저작물에서는 위의 세 가지 문체가 공존하고 있었으며, 국한문혼용체와 국문체의 구별 기준 또한 확실하게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의 저작물에서 발견되는 문체들은 한문체, 국한
국한문혼용체로 단순히 서구의 제도와 문물에 대한 소개서 혹은 견문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개화사상과 제도개혁구상을 집약한 개화사상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일본에서의 1년여의 체류, 미국에서의 1 년여의 수학, 도합 3년 미만의 외국생활과 수학 후에 쓴 것이지만, <서유견문>은 서양의 사정과
2. 1900~1910년 문학
1) 개화기 시가
1894년 갑오경장을 전후한 시기부터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된 1910년까지를 개화기 또는 애국계몽기라고 부르기로 한다. 근대의 기점문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김현(1780년 영·정조시대 이후): “근대문학의 기점은 자체 내의 모순을 언어로 표현하겠다
주시경(1876-1914)은 국어 연구와 운동을 통해 일제침략에 항거한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황해도 봉산 출생이다. 어렸을 때는 상호(相鎬)라 불렸지만 한힌샘, 백천(白泉)이라고도 불렸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던 중 신학문에 눈을 떠 1894년 9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다. 도중에 인천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였다. 94년에는 내무총신, 내무협판을 지내면서 개혁에 참여하였고, 95년에는 내부대신에 올라 음력 폐지·종두법 실시·우편개시·건양(建陽) 연호사용·단발령 실시 등을 과감히 추진하는 한편, 《독립신문》 발간에 국고보조를 단행하였다.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