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미개척분야에 대한 기초조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에 대한 문제다. 불교가 중국인의 생활․사상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때, 과연 모두 같은 방법으로 또한 동등한 정도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분명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국경전이 있었기에 불타의 가르침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중국의 전래사상과 불교가 융합하면서 새로 일어난 종파불교와 선불교의 양대 세력이 우리나라 불교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지배하여 왔음을 볼 때도 중국불교가 불교사 전체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큼을 알 수 있다.
한편
사회적 불안은 절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소금의 암상인으로서 반체제적 활동을 해오던 산둥의 왕선지 ․황소 등이 난을 일으켰다. 선지가 죽은 후 황소는 그 잔당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자와 종래부터 부하였던 자들을 핵심으로 하여 파산 농민이나 유랑
중국의 지배자로서의 한 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한 묘책인 것이다. 동중서(董仲舒) 등의 협력을 얻어 유교를 한제국의 공식적인 학문으로 채용하였고, 또한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문화권” 역시 등질지역이다. 즉,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지역의 경계를 설정하여 세계를 나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크게 동아시아문화권을 결정짓는 네 가지 요소, 즉 한자, 유교, 불교, 율령은 자연지리적, 환경적으로 공통적으로 형성되어 나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