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뜻하는 중의적 수법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송이는 자신을 천길 낭떠러지 위의 낙락장송에 비유하여, 비록 기녀라고는 하나 지조와 절개만은 고고하고 의연하니 작은 낫으로는 나를 넘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길 아래 초동’ 즉 쉽게 접근해오는 사대부들을 비아냥거리고 있다.
시조 연행이 이루어지는 풍류현장에는 접근하기가 어려웠으며, 감정을 절제하라 훈육 받아왔다. 이에 반해 기녀들은 그들의 생업이요 또 하나의 신역으로 남성들의 풍류에 참여하여 흥을 돋우어 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남성들이 애호하는 장르에 친숙해야 했으며 남성들의 호불호 감정에도
시조에 적절하게 화답하는 교양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지로 한국 시조사에서 기녀시조는 차지하는 비중도 절대적이다. 그러나 여성, 기녀작가라는 이유로 남성작가에 비해 문학 활동은 매우 저조하다고 볼 수 있다. 귀녀의 시조와 선비의 시조는 특징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남성
시조 등에서도 지속성이 인정된다. 이후 조선후기에서는 중세사회를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시작되었다.
왕조교체기의 문학은 조선왕조의 건국사업을 담당한 쪽과 고려를 위해 충절을 지키려는 쪽으로 노선이 분열되었는데 이를 관각 혹은 관인문학, 처사 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