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우암 송시열이 이 경향을 대표하는 학자, 정치가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송시열은 국보 239호로 지정된 초상화속의 노인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 초상화 속의 송시열은 노인답지 않은 날카롭고 고집스러운 눈매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초상화의 작자는
학파간의 논쟁은 비록 철학 사상에서 생기는 의견의 차이로 시작한 학술적인 논쟁이었지만 그 속에는 정치성과 지역성이 가미되어 하나의 치열한 당쟁으로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것으로 사림은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분화되어 약 300여 년간을 당쟁(黨爭)의 시대로 이끌어 가게
식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단지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의 도식은 문제가 있다. 사단칠정을 기준으로 하여 조선의 모든 유학자들을 영남(주리)과 기호(주기) 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카하시 본인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기준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
학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대용(1731-1791) · 연암 박지원 · 초정 박제가(1750-?) 등이 중심이 된 북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에서 소외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중심의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의
식의 과학으로서의 수학 즉, 정의, 규칙, 정리 등의 형식화된 내용을 강조하며, 과정보다는 생성된 결과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측면과, ‘발생 상태 그대로의 수학’ 곧 ‘실행수학’은 정의, 규칙, 정리 등이 정리되고 형식화되기까지 일련의 활동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성된 결과보다는 그러한 결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