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시의 중요한 성과는 사회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문학경향과 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시언어의 영역에서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노력이 시를 통해 동시에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 시인>인 김수영은 단순히 이념적인 차원이 아닌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실천하는 진정한 전위적 시
김수영이 바로 그런 존재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김수영만큼 그 논의의 폭이 넓고, 매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시인도 드물다. 이는 김수영의 시가 그만큼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자, 여전히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던져주는 시인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1990년대 이후 김수영에 관한 연구
모더니즘적 세계관은 김수영의 후기 시에까지 어떤 태도로 남는다. 그것은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즉 시의 소재나 지향점이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시적 성취를 이루려는 태도를 끝까지 고수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6․25 전까지의 김수영의 시의 특징은 현실에 내재한 가치적 존재를
김경희 ․ 박일영 ․ 임호권 ․ 김병욱 등 당시의 모더니스트들과 조우한다.
1946년(26세) 김수영은 《예술부락》에 시「묘정의 노래」,「孔子의 生活難」,「거리」,「꽃」등을 발표함으로서 등단하고, 이를 계기로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그리고 해방 공간을 명동에서 지내게 된다.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글은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공자의 생활난>의 구절을 가장 큰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는 ‘나는 바로 보마’의 6자가 김수영의 모든 시의 정신이자 좌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론가 김현은 이를 ‘나의 반란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