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온, 강희맹, 이승소, 성임 등은 본원적으로 보면 모두 세종의 인재등용이었다. IT의 숨은 보석 장영실도, 음악의 천재 박연 또한 그러하다.
2) 능력주의, 성과주의에 따른 인재관리
세종의 인사정책의 원칙은 능력주의와 성과주의였다. 왕실의 종친이라 특혜를 주는 일도 없었고 아비가 훌륭하다고
김수온강희맹이승소성임 등이 세종 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이들은 모두 집현전 멤버가 되어 세종과 함께 국가 경영에 나선다. 인재전쟁은 원이 명으로 바뀌면서 중국에서도 일고 있던 동아시아적 열풍이었다. 세종은 ‘경영=인재관리’라고 생각하고 있어왔고, 그런 세종의 기대에 부응해 변계량은 출
김수온(金守溫) 등 11명으로, 이들은 당대의 불학(佛學)을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들이었다. 내용은 《월인천강지곡》의 각절(各節)은 본문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의 《석보상절》은 주석(註釋)같이 하여 엮어졌다. 원본이 완전히 전하지 않아 당초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지 명확하지 못하나, 1995
김수온의 ‘봉선사기’에 의하면,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능침인 광릉을 보호하기 위해 예종1년(1469)에 봉선사를 중창했다고 한다. 중창 당시 전각은 모두 89칸으로 적지 않은 규모였다. 당대의 권신들인 한명회와 정현조, 구치관 등이 공사를 관리, 감독했을 정도로 왕실의 애정이 각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