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6월에 감행한 보천보(普天堡)전투가 그것이다. 보천보 전투의 경우 김일성이 지휘하는 약 100명의 항일유격대가 동원된 전투로서 규모는 크지않았으나 그 파장은 매우 컸다.
- 당시 국내 언론들의 이례적 호외보도는 암흑기로 빠져든 식민지 조선 상황의 탈피욕구가 반영된 것이아닌가한다.
까지는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결과 1945년 10.28일에는 `5도 행정국`이 발족되었다. 소련군정에서 인민위원회를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기구였다. 1945.12.17∼18일 분국 3차 확대 집행위원회에서는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김일성이 위원장이 되었다.
조선로동당이 합당되어 ‘조선로동당’이 되었고, 김일성은 여기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전쟁 휴전(1953.7.27.)전인, 1953년 2월8일, 조선인민군 창건 5주년에 조선인민군 원수에 취임하면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된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정권의 수립 과정(1945년~1950년대
거창하게 소개되었고, 1946년 2월 김일성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리고 이승만은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의장으로서 양인은 북한과 남한의 지도자로 각각 지명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보다 신화화되고 성스럽게 되었는
김일성은 이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청산유수적인 연설을 내뱉고 소비에트식 정권을 유지시켜서 북한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1948년 7월 인공기를 제정하고, 남북분단이 현실화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고 그 수상이 되어 명실상부한 권력의 핵심자로 발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