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엽은 첫째 부인인 한씨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성(筬)을 두었고 김씨부인과의 사이에는 봉([竹封]), 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의 2남 1녀를 두었다. 허엽은 난설헌 18세 때 상주에서 객사했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은 호가 악록이고 이조·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작은오빠 허봉은
대한 바람이 일었다. 이 바람을 타고 여성 작품들이 대량으로 출판되고 여류시집들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중국 시단의 시대적 바람은 조선에 출정한 명군사와 문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중국문단의 이러한 여류 시 바람은 허난설헌시를 더욱 빠르게 중국대륙에 전파시켰고, 중국문인들
. 그녀의 형제인 허성․허봉․허균은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 중 허균은 <홍길동전>으로 유명하다.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운 난설헌은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음으로써 발군의 시적 재능을 보여 여신동이라 불렸다.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읊었고,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한과 설움을 토해냈다.
그런데, 역사에서 황진이나 신사임당과 같은 사람들에 비해 허난설헌에 대해 말이 많았고, 명기로 일컬어지는 황진이나 현모양처로 명성을 날리는 신사임당에 비해 그녀에 대한 이렇다할 긍정적인 평가들은 논쟁의 대상이
여인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인생을 숙명처럼 살아왔다.
이런 시대에 으뜸으로 꼽히는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 황진이, 이매창, 허난설헌이 있는데 특히 허난설헌의 문학은 일종의 금기를 뛰어넘은 위험하다 할 수 있는 도전이며 , 당대 사회에서 충격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