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단독적인 존재가 아니며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집단적 존재이다. 공자는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다”, 즉 극기복례를 강조하였다. ‘극기’는 개인적 자아를 극복한다는 의미이며 ‘복례’라는 것은 사회적 자아를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공자는
유학은 큰 전환을 보게 된다. 조선 전기의 도학적 전개에서 인성론적(人性論的) 전개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었다. 거듭된 사화(士禍) 조선 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던 일.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있었다.
로 인하여 실천궁행을 중시하
정치사상을 꾀하게 되었다.
공자와 맹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회, 정치적 배경은 신분제 질서가 붕괴되어 혼란이 극에 달했으며, 경제적 구조의 변화로 인간의 욕심마저 극에 달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본성 회복을 통하여 극복하고자 하였다.
②사상적 배경
유가 사상은 중국의
얻어 유교를 한제국 공허(公許)의 학문으로 채용하였다.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재야 여러 학문의 하나였던 때에 비해서 차차 그 사상적 내용의 긴장성을 잃어갔다.
공자(孔子)가 제자 자로(子路)의 ‘귀신 섬기기와 죽음’에 대한 물음에 답하여 “서람 섬길 수도 없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으리오.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라고 말한 예[논어(論語)-선진]에서 알 수 있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삶이란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이 현실을 버릴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