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학의 맥과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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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유학의 맥과 흐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유학의 수용과 한국 사상의 원형原型
1) 유학의 수용

2) 한국 사상의 원형

2. 유학의 토착화와 전통사상으로의 보편화

1) 삼국시대, 전통사상으로서의 보편화

2) 여말선초, 사상적 전환과 ‘유학의 나라’ 건국

3) 한국 성리학 융성, 퇴계와 율곡의 출현

4) 조선 후기, 근대로의 지향과 실학의 대두.

3. 한말(韓末), 유림 운동과 심산(心山)의 지조(志操)


본문내용

2) 여말선초, 사상적 전환과 ‘유학의 나라’ 건국
- 송대에 이르러 유교는 성리학으로 고도의 철학적 전환을 이룬다. 그리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이치와 객관적 실재를 동시에 규명하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삼고, 특히 신유학은 인간 내면에 대한 주체적 성찰과 보다 구체적인 측면에서 현실 사회의 문제를 중시하여, 국가 사회적인 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현실지향적 특성의 이데올로기였다.
- 성리학은 고려 말기인 충렬왕 때 안향(安珦)등에 의해 원으로부터 수용되었다. 어디까지나 사료에 기록된 바에 근거한 서술이다. 다른 여러 기록에 근거할 때, 성리학은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와 문신들이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안향은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 도입과 보급에 힘썼다.
당시 고려는 내부적으로 오랜 무신집권으로 인해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사상계가 혼미, 대외적으로도 원의 멸망과 명의 발흥 등 긴장과 혼란 속에서 성리학을 열렬히 환영,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불교와 유교는 신비주의에 빠져 종교적 구실을 제대로 못하였고, 기존의 유고도 크게 쇠퇴하여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 그러나 성리학으로 국가 건설을 위한 전환을 도모하는 입장은 같았지만, 역사 해석과 현실 인식에서는 상당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려 지식계층은 두 계열로 분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 계열은 더 이상 고려왕조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정도전 중심으로 하는 신진세력이었고, 다른 계열은 고려 왕조를 계층하면서 개혁과 중흥을 도모하려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이었다.
- 비록 정도전 중심의 신진세력이 조선개창의 주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전통은 오히려 의리와 충절을 표했던 정몽주 계열이 잇게 된다. 결국 한국 유학의 정맥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조선전기 유학의 도학적(道學的)전개 양상을 나타낸다. 정몽주의 사상은 길재(吉再)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전승되어 한국 도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3) 한국 성리학 융성, 퇴계와 율곡의 출현
- 16세기 중반 이후 한국 유학은 큰 전환을 보게 된다. 조선 전기의 도학적 전개에서 인성론적(人性論的) 전개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었다. 거듭된 사화(士禍) 조선 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던 일.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있었다.
로 인하여 실천궁행을 중시하던 도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