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이 그처럼 근대 지향적인 인물이었다면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해야 했을까? 그 첫 번째 답은 지나친 쇄국으로 인해 조선 전체가 근대적인 시각과 능력을 갖출 시간적인 여유를 박탈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이전에도 많이 거론되어 왔던 이유이다.
두 번째로 앞서 언급했던 그의
조선에 찾아온 열강들을 양요를 통해 물리친 이후지만, 국제정세의 조류를 감지한 고종과 그의 측근들은 개화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다. 또한 열강들과의 등거리외교를 통해 서로 견제를 유도하려는 고종의 노력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2. 운요호사건과 개항
일본은 1875년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
사건.
1868
오페르트 도굴사건
독일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거절당하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한 사건.
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1876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맺은 조선 최초
확립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웠다. 그리고 관리와 백성들의 사치와 낭비를 철저히 막는 한편 양반과 상민의 구별없이 세금을 거둬들였다.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경복궁을 고쳐 지었다. 그리고 서양 강대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쇄국정책을 폈던 것이다.
근대화된 국가를 세우기를 원했다. 따라서 유럽과 미국 등지로 이와쿠라 사절단을 보내 그들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하였다. 187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정계에 정한론이 대두되어 운요호사건을 시작으로 조선을 일본의 영향력 하에 두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