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이 그처럼 근대 지향적인 인물이었다면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해야 했을까? 그 첫 번째 답은 지나친 쇄국으로 인해 조선 전체가 근대적인 시각과 능력을 갖출 시간적인 여유를 박탈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이전에도 많이 거론되어 왔던 이유이다.
두 번째로 앞서 언급했던 그의
정책을 지양하여 외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관계를 가지게 되는 역사적
전개.
서양의 상황
-15세기 르네상스 이후 산업 혁명기까지 300년 동안 발전구축
-19세기 중엽 자본주의의 고도 발달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
전개
한국의 개항
-흥선대원군 : 열강의 침략에 쇄국정
왔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조선에까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이양선이 자주 출몰)
미국의 셔먼호가 대동강을 오르내리며 침략을 도발한 이후, 프랑스의 천주교도 박해를 이유로 한 병인양요 등 수 차례의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된다. 이들은 이러한 전쟁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했고, 그것이 쇄국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한 사건.
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1876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맺은 조선 최초의 근대화 조약이자 불평등조약 (해안 측량권, 치외법권 허용).
1882
조·미 수호
19세기 후반에 조선왕조가 쇠락의 징후를 보이고 있지 않았거나 서양세력이 동아시아로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형태로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를 마주 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일제의 조선 침탈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을 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