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거리외교를 통해 서로 견제를 유도하려는 고종의 노력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2. 운요호사건과 개항일본은 1875년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시켜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내 반한감정을 고취, 대규모 파병준비를 하면서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일본의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서양의 충격에 대한 군사적 관심이 그 과학기술의 도입을 통한 공업화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위정척사의 논리를 보면 서교와 서기를 구별하는 관점이 없이 사학 혹은 사교에다 서기까지 포함시켜 배척하고 있다. 정학으로서의 동도와 모순 되는 것은 서교로서의 천주교이
일본이 서양과 국교를 연 것을 경계하면서 일본의 외교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정부의 내부에서는 조선에게 무력으로 개국을 요구하자는 정한론자들이 세력을 얻고 있었다. 국내의 반정부 움직임을 조선침략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정한론은 불평사족들을 없애는 대
사키에 도착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의 보고를 통해 군란 소식을 알게 된 일본정부는 조선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하나부사를 전권위원으로 하여 군함과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6월 29일 제물포에 도착한 하나부사는 7월 7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7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출하고 3일 내로 회답
민씨정권은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대외 통상을 전담하게 하였고, 이와함께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군대를 설치하였다.
1881년에는 청에 영선사(領選使)를 보내어 무기 의 제조, 근대적 자연과학, 외국어를 배우게 하는 한편,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명치유신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