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몽촌토성이 왕성으로 위치하기에 불합리한 점
몽촌토성은 여러 측면에서 한성시기의 왕성으로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궁궐이나 관청이 있었던 대형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권위 있는 건물에서만 사용되는 기와가 출토되어 신분이
Ⅰ.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풍납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5년(乙丑年) 8월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될 당시 중국제 靑銅·斗를 비롯하여 耳飾金環·銅弩·白銅鏡·銙帶金具·紫紺色 琉璃玉, 4구획 원문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 내부에서 이렇듯
건물지가 드러나서 그곳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연못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일부에 적힌 문자를 근거로 그 조성시기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전하는, 문무왕 14년(674년)에 조성된 궁지(宮池)였음이 밝혀 졌다. 그때까지는 안압지의 축조연대를 일인(日人)학자들이
. 그 중 5호 집자리는 장축 길이 10.7m, 단축 폭 7.3m의 대형으로 단단하게 바닥을 다졌다. 특히 상부에서 수막새 2점 내부에서 암키와편 2점이 출토됨으로써 초기 백제 한성시대에 실제로 기와를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당시 발굴에서 백제 초기의 여러 유적이 확인되었다.
2)경당지구 및 관련 유적
건물지
-방형의 도랑, 지붕을 받치는 기둥구멍, 흙벽을 유지시키는 작은 기둥구멍으로 구성
-최근 백제지역의 공주 공산성, 공주 정지산, 공주 안영리 등지
-한반도와 관련한 유적으로 도래인과의 관계를 상정할 수 있음
-중심연대는 5세기 중후반으로 추정
-원삼국시대에서 백제시대로 이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