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으로 북상, 조정에서는 보장처로 피신하여, 수비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영조는 도성에서 삼군문의 주요 병력 및 도성민과 함께 변란에 대처하겠다는 도성사수론을 천명한다. 이후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무신의 난을 계기로 도성사수론이 본격화 되면서 영조에 의해서 수도방위체제는 도성을
체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그 운영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1751년(영조 27) 『수성절목』에서 구체화되고 있음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 현재의 북한산성은 숙종 때 쌓은 것
*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대외적 전란과 이괄의 난 등 대내적 위협을 겪고 수도방위에 문
도성수비체제(三軍門都城守備體制)의 성립과정
삼군문도성수비체제의 성립은 금위영 설립으로 확립된 오군영제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수어청과 총융청은 기보(畿輔) 경기지방
를 관장하는 군영으로 제외시키고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방위체제를 구성하게 되었
이인좌의 난을 겪었고,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 나주에 괘서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 토역과를 보일 때 그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은 왕권 강화를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