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三軍門都城守備體制)의 성립과정
삼군문도성수비체제의 성립은 금위영 설립으로 확립된 오군영제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수어청과 총융청은 기보(畿輔) 경기지방
를 관장하는 군영으로 제외시키고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방위체제를 구성하게 되었다.
히나
체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그 운영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1751년(영조 27) 『수성절목』에서 구체화되고 있음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 현재의 북한산성은 숙종 때 쌓은 것
*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대외적 전란과 이괄의 난 등 대내적 위협을 겪고 수도방위에 문
방위 및 그 물력 부담의 의무를 책임 지우는 군역제도 등이 그 전형적 형태들이 아니었는가 한다.
이는 중국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존속한 적이 있었으나 중국의 경우 그 같이 강고한 신분제도라든지 토지 분급제도는 이미 고대사회의 종말과 더불어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나, 한국사에서는 지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신정부의 정치 외교상의 브레인은 견당유학생 출신으로 구성되어 자연 중국을 모델로 한 정치개혁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외교상으로는 친신라 친당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도 백제와 고구려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전방위외교를 추구하여 당시 급박했던 동아시아분
피신하여, 수비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영조는 도성에서 삼군문의 주요 병력 및 도성민과 함께 변란에 대처하겠다는 도성 사수론을 천명한다. 이후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무신의 난을 계기로 도성 사수론이 본격화 되면서 영조에 의해서 수도방위체제는 도성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