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묘지명들은 거의 모두 관료 계층의 것이며, 시기적으로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의 것이 가장 많다. 이는 이들 묘지명이 대부분 당시 수도이던 개성 주변에서 수습된 사실과 관련이 있다. 관료들의 무덤이 지방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는 것은 고려 후기의 일이다. 묘지명은 그 형태나 내용 체제 등에서
고려 고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존속한 문학이다. 한학자들의 파한(破閑)에서 발생한 과도기적 시가이다. 한문구를 나열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이두를 사용했다. 내용은 퇴폐적, 고답적, 현실도피적이다. 일부 작품은 신진 사류들의 의욕적인 기개와 의식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조동일. 「한국문학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고구려 건국 신화에 대한 것, 두 번째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위업과 영토 관리, 세 번째 장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제의 실상과 수묘인의 신분이 기록이다.
→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주장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
고려시대 묘지명(墓誌銘) 자료의 활용
저자가 인구 변동을 알아보기 위해 사용한 자료는 묘지명 자료이다. 그것은 김용선 교수의 고려시대 묘지명 일람표로, 금석문 문집 등에 산재되어 있는 묘지명들을 연구자들이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라고 자료를 소개한다. 이것은 묘지명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