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오신화(金鰲神話)에 대하여
김시습이 경주의 금오산에서 창작한 것으로 창작 당시 몇 편이었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은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5편만 전하는 전기적(傳奇的) 한문 소설집이다. 전래되던 설화 문학을 계승하여 소설
과거 실패, 그리고 패도의 등장 등으로 말미암아 깊은 좌절을 겪고 있다. 이것은 금오신화의 각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바라고 하겠다. 매월당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 독서하다가, 21세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머리
㉠글을 쓰면서
당대 명문가요, 앞길이 탄탄대로일 수 있었던 그는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보수적인 지배층들의 눈 밖에 났다. 허균은 시대의 반항아요, 탁월한 문인이었다. 그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예리한 감수성, 그리고 진보적인 기질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속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스러운 성격을
1. 시대적 상황
허균은 16세기 말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살았다. 이때는 조선조가 중기로 접어든 때였다. 조선조가 세워진 뒤로 중기까지에는 태종과 세종의 손에서 내정의 바탕이 굳게 다져졌고, 또 왜구와 북방 민족의 침입이 크지 않아서 나라의 기틀이 튼튼해졌으므로 비교적 태평스러운 세월이
(1)약전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고려 상장군 금용(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德寧府尹) 안세(安世)의 8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열의 아들로 명종 9년(1554)에 인동 남산에서 태어났다.
7세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 부친을 잃고 11세때 학자인 신당 정붕의 아들 정각(鄭慤)이 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