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와 벽초의 우의(友誼)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단재가 벽초에게 보낸 옥중서신은 두 사람의 우의가 어떠했는지 잘 알려준다. 사상적 교류가 많았던 두 사람의 편지에 나타난 역사적 자취에서 나라에 대한 애정과 충정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많다.
산 같이 쌓였던 말이 붓을 잡고 보니, 물
학혁명 이후 개화와 신문물의 도입을 빙자한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된다. 이에 대한 반발이 1895년 을미의병으로 조금씩 표출되고 1905년 을사의병으로 불붙어 1907년에 전국규모로 크게 번진 정미의병 봉기는 경술국치를 앞둔 1909년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의병장들은 의병을 일으킬 수
학의 길을 터 주었으나 1887년이 되는 해에 아버지 신광석이 38세로 별세하여 어머니 그리고 형님 재호와 함께 교육관계로 향리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고두미)로 이사하게 된다. 할아버지가 향리에서 작은 한문 서당을 열어놓고 있었으므로 이 서당에 들어가 엄한 교육을 받게 되는데 특히 신채호는 어릴
사상을 통해서 그 답을 풀어 나가고 싶었다. 따라서 신채호의 사상을 되짚어 보면서 조선말과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고민을 공유해 보고 더 나아가 ‘그의 사상이 어떻게 현실 속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그 당시의 상황을 그는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는지‘도 알아보고자 한다.
신채호(이하 단재)의 역사학은, 역사관․역사연구 방법론에서 이미 근대 사학의 수준에 도달하였고, 사학 정신이나 그 지향점 또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결실이었고, 단재에 이르러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역사관은 한국사 인식체계와 역사 무대의 확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