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일제는 실업학교령을 칙령으로 반포하게 되는데 이는 식민지 실업교육의 바탕이 된다. 실업교육령의 내용 중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모든 실업교육을 일본이 관장하는 것과 압도적인 일본어 교육 시수의 증가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 교육을 위해 1911년 조선교육령을 제정, 공포하
문호개방과 대외통상의 필요성은 이미 북학파 실학자 인 박제가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또 개항전에도 김정희(金正喜), 박규수, 오경석 등 일부 선각자들은 청 의 양무운동과 양무론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세계정세의 대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견을 일부 청년들에게 전파하고 가
다.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
일제에 맞서 정면으로 대결해 온 한국민은 일제강점 이후 민족이 광복될 때까지 저항과 개화(근대화)의 구국투쟁과 함께 자율적 발전을 양면에서 거듭해 왔다. 민족의 완전 독립을 위한 한민족의 전통적인 국권회복운동에 관해 일제는 1930년대말부터 황국신민화
교육이 크게 발전한 것도 1963년에 개정 ·공포된 실업계 고등학교 교육과정령에서 실업계 고등학교 교육과정령을 별도로 제정 ·공포하고, 공업교육에 힘을 기울이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공업고등학교의 교육과정령에서는 학과를 기계 ·건축 ·토목 ·전기 등 18개 학과로 분류하고 필수과목과 선택
교육 이수자는 제외하고 대부분 실업교육 이수자만을 대항으로 함으로써 이들 중에는 대학 진학자가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 사비 유학생도 유학생을 통해 ‘불온사상’이 유입, 전파된다는 이유로 유학 단계나 진학과정 자체가 철저히 통제되었다. 따라서 3·1운동 이전까지는 총독부 관비 유학생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