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가 결성되어 공업의 필요를 선전하는 동시에 지식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보였다. 또한 각종 과학단체가 전국을 순회하며 과학강연회를 개최하여 대중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노력으로 교육에서 가해지던 각종 차별 및 불이익도
기술인력의 진출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총독부가 1939년 일본 본토에 요구한 ’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에 묶인 공과계 졸업생은 약 3,400명 정도였는데 할당된 숫자는 771명에 불과하였다. 이 규모는 요구인력의 23%에 불과했다. 특히 채광야금, 기계, 전기 분야는 600여 명에서 900명의 인력이 부족한 형
Ⅰ. 서론
냉전이 종식된 후, 국가간의 경쟁은 이미 군사 대항 위주에서 경제 실력의 전면 경쟁으로 전환되어, 국제 시장의 점유 능력,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 지속 가능한 발전 능력의 신속한 제고로 집약된다. 과학기술 혁신을 기초로 하는 경제 안전은 이미 국가 안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
섬유산업을 보호하고 섬유산업의 재활성화를 위해 다자간 섬유협정(MFA)를 중심으로 개도국에 대한 섬유수입 규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후발국은 섬유산업을 집중 육성하였다. 노후시설 개체자금 지원과 함께 기술개발, 인력양성 및 통상활동 지원 등을 위해 근대화 기금을 설치, 운영하였다.
한국인 공업 자영자 혹은 일본인 공업가들에게 시범적인 실습공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③ 한국 전 지역에서 가내공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고 선전 지원을 할 자영 수공인력이나 기술교사 및 조수를 양성하는 역할을 했다. 졸업생을 각 지역에 자영인력으로 내보내고 일부는 기술교사나 시험조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