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인 즉 성리학의 소양을 쌓은 지식인 계층이었다. 이들은 고려 말 점점 중앙에 진출하여 그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고, 성리학 사상의 실천을 통해 고려 말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운영 시스템, 사회 기강과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공민왕이 의문의 시해를 당함으로
이단을 구별하고, 불교와 도교와 대항해서 현실성을 가지고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그 특징이다. 또한 그들은 학자이면서 동시에 관리이기도 했다.
ꊴ 신유학의 선구자 (1) ; 신유학이 등장하기 전, 당말기에 신유학에 영향을 끼칠 인물들
한유 『원도』 ; 도가의 반문명주의에
유학의 요청 속에서 이루어 졌다. 시대적 요구는 한유와 이고에 의한 송학의 발흥으로부터 시작되어 정학과 북송오자를 거치면서 사상적으로 발전해 왔고 이러한 사상의 흐름이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다. 주자는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추구하고 나아가 뿌리를 주돈이에게 두고 정이의 학설과 소옹
유학이 성립되었다. 국학으로 채택되어 정치적으로 지지를 받는 체제 속에서 유지되어온 학문으로 전한(前漢)시대에는 경세치용(經世致用:정치적 실용)의 학문으로, 후한(後漢)시대에는 훈고학(訓學)으로 발달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정의(正義)의 학으로, 송(宋)나라 때에는 성리학(性理學:朱子學)
유학은 얼핏 복고주의 같지만 사실은 고식화된 주자학의 공소성을 비판하고 유학의 실천적 기풍을 되살리기 위하여 주자보다 더 큰 권위를 빌어 온 것으로 실증주의적 경전해석이라는 근대적 사유의 싹을 보이고 있다. 이들 사상이 중세사회 붕괴의 조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후에 근대적 사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