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명
주축세력
피해세력
발단
결과
대립구도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4)
이극돈,
유자광 등
훈구파
김일손, 권경
유 등 신진
사림세력
김종직의
조의제문
김일손 등
신진사림파
의 처벌
훈구파와 사
림파의 대립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 10)
연산군과
궁중세력
성종 비인
윤씨의 폐
사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2) 무오사화
(1) 배경
무오사화가 일어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개인 간의 원한, 향촌사회로의 질서 확립 문제를 둘러싼 이해관계에 따른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연산군과 삼사의 갈등이 그것이다.
① 개인 간의 원한
김일손과 이극돈의
김일손 이하 당대의 명유 육십여 명을(사림파) 같은 죄로 몰아 죽였다. 이 학살 사건은 연산군 4년 무오7월에 일어났던 일로써 그 원인이 사초에서 발달된 것이라 하여 이를 무오사화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무오사화 이후 길에 선비차림을 한 행인이 끊기고 각 처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어졌다.
사화’가 발생하였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때부터 훈구 정치 시대의 말기적 현상인 외척 권신정치시대 공신 세력이 늙어 죽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 주장에 염증을 느낀 왕이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김안로․윤임․윤형
사화에 의해 사림 대부분이 제거됨
ㄹ. 중종이 훈구파 견제를 위하여 다시 등용-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정계에서 밀려남.
ㅁ. 이후 완전히 몰락하지 않고 서원, 향약, 유향소를 바탕으로 성장
- 서원 : 제사, 학문을 연구, 지방으로 확대하면서 당파를 결속
- 향약 :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