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등장과 성장사림이란 원래 사대부의 무리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문․무 양반 관료와 그 일족, 그리고 벼슬하지 않은 선비들까지 포함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세조가 정권을 잡은 이후 성종에 이르는 18년 동안 250명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勳舊派)&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
불행히도 한국의 근대사학은 일제가 한국을 침탈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하여 동경제대 출신의 학자들을 이른바 ‘조선사연구’에 투입하였다.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한 사전준비의 일환이었다. 이들 일제학자들은 역사주의에 바탕을 둔 Ranke의
조선말의 사회적 배경
16C 말엽 (1592 ~ 98)에 조선왕조가 겪었던 壬辰.丁酉의 왜란은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는 국내에서는 오랜 士禍期를 거쳐 士林이 정치의 주축을 이루었지만, 잇달아 사림들내의 분열로 朋黨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혼란하였고,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