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과 훈구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 ‘기묘사화’가 발생하였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때부터 훈구 정치 시대의 말기적 현상인 외척 권신정치시대 공신 세력이 늙어 죽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 주장에 염증을 느낀 왕이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
연산군
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
부 사림파의
선비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
윤씨 복위에
반대한 선비
들을 처형(부
관참시)하고
가족들도 처
벌
연산군 주도
의 사화
기묘사화
(1519년, 중종 14)
심정,
남곤,
훙경주 등
훈구파
조광조 등
신진사림세
력
위훈삭제사
건
조광조 등
기묘명현
중종 14년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중심의 사림파가 축출된 사건.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여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고, 위훈삭제 사건으로 음모에 휘둘림.
지역적_ 경기도, 황해도 남부, 그리고 충청도 북부를 아우르는 지역
학문적_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르는 주기적(主氣的) 경향의 성리학자
농민들이 전호(佃戶:소작농)로 전락했으며 훈구파들의 대토지 소유로 중소지주였던 사림파의 지방 기반을 크게 위협했다. 즉 사화(士禍)는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4대 사화를 극복하고 명종 말엽에 이르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세력을 넓혀나가고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훈구파들의 견제가 있게되고 결국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폭압을 일삼던 연산군이 축출되는 1506년의 중종반정은 사림파에게도 새로운 정치적 진출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