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양천향교(陽川鄕校), 그리고 기술교육기관 중 사역원터(司繹院攄) 및 광혜원터(廣惠院攄)를 답사유적지로 정하였다. 대표적인 지방교육인 사원 중에서 서울로 편입된 도봉서원(道峰書院)이 있지만 더 나은 답사 동선을 계획하기위해 답사주제에서는 제외시키기로 하였다.
1. 시대적 배경
조선시대에는 인접한 나라들의 통역을 관장하는 사역원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한자, 청자(淸字), 몽자(蒙字), 왜자의 사자(四字)가 설치되어 있었고 한어, 만주어, 몽골어, 일본어를 학습하기 위한 역학서를 많이 간행하였다. 이곳에서는 역관의 외국어 학습을 위해서 많은 역학서가
조선시대의 일본어교육은 세종3년(1421)부터의 기록들에 의하면 학습해도 정규 발탁이 없었으므로 역관 희망자가 없어지는 폐단 때문에 일본어를 완성한 자는 예조에 보고하면 이중에서 수시로 채용토록 한다는 조처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세종3년 8월 무술조」에는 사역원의 외국어 학생 정원은 중
사역원(司譯院) 역관들의 중국어 학습 및 역과 한학서로서 이 책의 위치가 변함없이 공고했음을 알 수 있다. 사대와 교린 정책이 외교정책에 있어 국시(國是)였던 조선조에 있어서 사대 정책을 위한 중국어 학습은 언제나 중시되었다. 실질적인 중국어 학습에 있어 이 책은 언제나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
사역원에서 일본어 교육을 위해 사용하였던 교재를 이르는 말이다. 조선 초에 사용되었던 왜학서들은 임진왜란 후 ‘첩해신어’ 한권으로 대체되었고 이 ‘첩해신어’를 통해 왜관들은 왜학 역관의 임무 수행에 필요한 일본어 지식을 모두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첩해신어의 개수 과정과 어휘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