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루는 주로 사찰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찰이 대부분 산지 지형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유형은 지형에 따라 석축의 높이를 건물의 위층 바닥면과 같아지도록 조절했기 때문에, 별도로 담장과 문을 두지 않더라도 석축이 담장의 역할을 하고, 지형에 따라 놓인 돌계단이 문의 역할을 하
의미와 더불어 건축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이 상가람마를 ‘승가람마’로 표기하였고 그것을 다시 줄여 ‘가람’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번역하여 ‘중원’이라 하였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건조물로서 전당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또한 사찰의 통칭이 되었고 사원 자체를 가리키
그가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숙종 즉위년(1674)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자는 의견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축성 반대론도 적지 않아 미루어지다가 군사요청이 없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숙종 17년(1691)에 강화(江華)에 축성공사가 시작되면서 같은 해 11월에 비변사에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72년 해체·수리할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적어도 1363년 이전인 고려 중기(12∼13세기)에 지은 것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동양과 서양을 관통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중심의 보편적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신문고도 그 예이다. 신문고는 조선 태종 때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으로, 울리는 소리를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