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에게 의리정신으로 용해되어 의리와 명분에 바탕을 둔 사림정신으로 계승되었다. 몇 차례에 걸친 사화는 학풍을 크게 변하게 하여 이론과 사색의 방면으로 치우치게 함으로써 고상한 철리연구를 주안으로 삼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 학문은 붕당정치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Ⅱ.주희와 지역공동체
지방자치를 위해 주희의 시대와 후대에, 주희와 그 외의 다른 성리학자들에게 열정적인 지지대 역할을 한 네 가지 중요 기관이 있다. 그것은 지역 서원, 향약, 사창, 성리학에서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이다. 향약과 사창, 서원의 특성과 기능적인 면은 근본적으로 지역적이다. 각
육구연이 죽은 지 280년, 절강(浙江) 여요(余姚)에서 왕수인이 태어났다. 그는 육학의 진정한 계승자이다. 그는ꡒ내가 일찍이 세상의 비난을 덮어 쓰려 하였으나 상산(象山)선생께서 이미 그 설을 밝혀 놓으신 까닭에 비록 이로써 죄를 얻는다해도 한이 없다ꡓ고 하였다. 이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
육구연은 “心卽理也”라는 명제를 제출한다. 그는 말한다: “人皆有是心, 心皆具是理, 心卽理也.” 다시 말해 인심은 사물의 리를 지니고 있으며, 사물의 리는 인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滿心而發, 充塞宇宙, 無非此理.” 바로 이러한 의미에 해당한다.
육구연이 “심즉리야”를 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