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동요(신라의 향가)의 배경설화
무왕(武王)의 어머니가 홀몸이 되어 서울 남지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지용과 통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무왕(武王)인데, 어렸을 때 늘 마를 캐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여 살았기에 서동이라고 불렸다. 그러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공주의 재색이 뛰어나다는
, 마를 담는 바구니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일상적 여성의 생활 공간일 수 있는 마 퉁방이 여성의 은밀한 성적 유희의 장소로서도 파악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였다. 더구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통혼이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점도 이 작품을 민요로 보게 만드는 이유이다.
신라인은 향가라는 이름과 더불어 도솔가, 사뇌가, 시내 등의 세분된 명칭을 사용했다.
-형태의 다양성
향가가 하나의 단일적인 갈래가 아닌 것은 그 형태상의 다양성에서 볼 수 있는데, 삼국유사, 균여전, 그리고 예종의 ‘도이장가’를 더하여 26수인데, 이들 중 서동요, 풍요, 상화가 등이 4구체이
시대 말기부터 고려 초까지 유행하였던 한국 고유의 定型詩歌를 말한다.
2.2 향가의 명칭에 대한 견해
⑴ 초기 ▶ 唐樂 또는 漢詩歌에 대해 우리 시가를 낮추어 부르는 말. 신라통일 후 사대 주의사상에 기인하여 발생한 당악에 대한 자국의 노래에 붙여진 명칭
⑵ 근래 ▶ 자기비하적인
(2)형성(形成)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왕 5년 (A.D.28)에 도솔가(도率歌)가 지어진 것이 가악(歌樂)의 시초라고 하였으나, 오늘날 전해지는 신라 가요 6세기 통일 신라 이후의 것들이다. 따라 서,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전후(6세기-7세기)부터 시작되어 고려 광종까지 계속되었 던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