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층 밑에서 출토되어 즐문토기보다 먼저 발생한 것이 입증되었다. 융기문토기는 남해안 바닷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아무르강 유역과 松嫩平原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융기문토기의 중심연대는 기원전 6천 년기에 해당하나 상한과 하한은 좀더 연장될 것이
토기는 적어도 9~10세기경 새로운 도자기 유형인 청자가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전까지 고대인들의 음식 문화와 생활 습관, 의식 세계를 담아내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흔히 선사시대의 토기는 신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원삼국시대에 제작된 토기를 말한다. 불을 사용하고 간단한 도구를 제작하
독무덤은 14호 집터의 어깨선 안쪽에서 2기가 확인되었는데 삼각형 모음 무늬를 가진 토기 안에서 사람 뼈가 출토되었다. 또 후포리 유적에서 조사된 두벌 묻기 한 집단무덤은 다른 지방에서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화장 또한 행하여졌을 가능성이 연대도나 산등유적에서 확인된다.
신석기시대의 집자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집자리 유적은 정착 생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서울 암사동 유적과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 등이 바로 조개무지 유적이 아닌 집자리 유적이다. 이런 곳에서 출토되는 토기 등의 유물들로 신석기인들이 농사나 사냥 등 여러가지 생산활동을 영위했음을
선사시대, 특히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인천은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의 인천의 지명은 알려져 있지 않고, 삼국시대부터 걸쳐 여러 번에 걸쳐 지명의 변천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에 있어 인천의 백제 때의 지명은 미추홀이고, 고구려 때의 지명은 매소홀이었다. 그